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식민지 근대화론 (문단 편집) ==== 경제적 유산 ==== >전쟁 준비에서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진 과정은 1930년대부터 1940년대 초반까지 조선의 경제와 사회를 재편하였다. 분단으로 인해 상실되거나 아니면 광복이 된 지 5년 만에 발생하여 전 국토를 황폐화시킨 한국전쟁 중에 손상되고 파괴되었지만, 기본적인 산업 관련 사회 자본을 남았고 이는 1950년대의 부흥과 1960년대의 공업화가 급진전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1960년대부터 70년대 초반까지 수출 주도형 경제에서 주도적인 부문이었던 [[섬유]] 부문만큼 이를 명백히 보여주는 사례는 없다.1960년대의 섬유 산업은 박정희 정부의 유명한 경제 발전 5개년 계획의 결과로 갑작스레 출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1차 대전 중 시작되고 [[만주사변]] 후 1930년대에 개화한 개발 과정의 정점을 대표하였다. 그와 같은 재건 과정에 광복 후 [[미국]]의 원조가 기여한 바는 본질적으로 조선인이 경영한 경성방직뿐만 아니라 조선방, 동양방, 종방, 대일본 등의 일본 기업에 의해 구축된 자본과 기술을 공급한 것이었다. 이 산업부문이 한국전쟁이 끝난 지 불과 5년 후인 1958년에 이미 수출 가능한 상태에 이르렀다는 것은 식민지 유산의 심도가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명백한 지표였다. 식민지 지배 최후의 15년이 남긴 사회적 유산 또한 중요하다. 권위 있는 평가가 확립되기 이전에 식민지 말기에 관한, 또 식민지시기와 광복 이후의 관련에 관한 실증적 연구가 필요하며, 이러한 연구 과정에서 당시 실제로 발생한 사회 변화의 정도를 과장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확실히 광복 직후 대부분의 조선 인구는 농촌에 거주하는 가난한 농민들이었다. 그럼에도 1945년경에 적어도 수십만에 달하는 사람들 혹은 추정컨대 2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농촌을 떠나 공장 노동자, 기술자, 실업가, 관료와 기타 화이트칼라, 직업 군인, 전문가 등이 되었으며 훗날 한강의 기적을 낳은 주요한 사회 세력 대부분은 그 기원을 식민지 말기에 두고 있다. 과거와 현재 사이에 존재하는 그러한 관계를 제시하는 것은 식민지 마지막 10년 동안의 전시 동원의 참혹한 물질적.심리적 고통을 잊거나 변명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이는 이를테면 식민지 지배가 조선의 공업화와 사회 변화를 가능하게 한 유일한 길이었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고, 조선인들 스스로가 이를 실현할 수 없었다고 이야기하는 하는 것도 아니다. 많은 수의 조선인들이 이 시기에 자신들의 운명을 개선시킬 수 있었던 것은 전쟁의 급박함이 가져온 아이러니이며 조선인의 능력과 결단력을 보여주는 증거다. >---- >카터 에커트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650p~653p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